VIDA(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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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거대했던,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일 한 해, 2022년 회고
매번 하는 한 해의 회고이지만, 올해 회고는 유독 남다를거란 걸 한 해 내내 알았다. 올해는 딱 반으로 나뉜다. 매일 아침 아직 나는 자고 있을 때, 후안마가 출근하기 전 내 방에 들러 한숨쉬며 들이치는 햇빛을 막으려 페르시아나 내리는 소리를 듣곤 어스름하게 깨던 아침. 안젤로가 트는 음악소리가 좋아 부비적거리며 일어나던, 그러다 슬리퍼 끌고 시모네 방으로 들어가 나폴리타나랑 커피 마시러가자던 그 아침의 날들. 크로스핏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엔의 기차역 앞에 드높이 솟은 나무 탓에 갈라지는 하늘빛을 보며 이게 여유라고, 이게 숨쉬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았던 절반의 한 해. 가장 싫어하던 여의도역에서 매일 환승인파에 부딪히며 추운 날에도 체온으로 금세 달궈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이고 겨우 내 틈..
2022.12.28 -
유럽연합, 그 공동선의 휴지
유럽이 좋았던 것은, 내가 유럽에 산다는 것이 좋았던 이유는, 인류 문화와 유산의 어느 중심점이었기에 시선 끝에 자연스레 밟히는 황홀함도 있었지만, 더욱이 중요했던 것은 유래없이 공고한 인류의 공공선을 이룩했다는 데에 있었다. 나라와 나라를 경계짓고 각축하기에 바쁜 이 지구에서,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이어낸 그들이었다. 자원의 재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사회가 건강할 수 있는지, 그것에 대한 신뢰를 딛으면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했던 굵직한 나날들이었다. 내가 유럽에 발을 딛기 몇 해전에 브렉시트가 성공했으므로 그 연결고리들은 차츰 끊어지던 차였다. 유럽연합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자했던 친구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막혔던 이야기 등 실재하는 이야기들에 담긴 아쉬움 혹은 슬픔 혹은 비판은 먼나라..
2022.09.27 -
'다이어트 할 때의 치킨' 전략
다이어트를 할 때면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음식들이 종종 구미를 당기곤 한다. 젤리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내가 어느날 젤리를 먹고싶다 생각했다면 그건 다이어트 중인 것이다. 젤리마저도 그런데 치킨은 얼마나 숭고한 먹을거리겠는가. 그렇게 참고 참다가 치팅데이라든지 목표를 달성한 후 맞이하는 치킨은 가히 치느님이라 불릴만 할 것이다. 따라서 '다이어트 할 때의 치킨' 전략이라는 형편없는 이름은 이렇게 비롯되었다. 일을 진행하고 싶을 때 적기가 올 때까지 겨우 참아낸다면 가치가 없었던 것들이 가치를 갖게 된다든지 원래 가치가 있었던 것들은 기존의 가치를 상회하게 되는 현상. 이를 일컫는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때로는 판이한 결과를 부른다. 그래서 그 결과가 좋다면 그건 '터닝포인트..
2022.09.07 -
두 교황(The Two Popes), 진리에 관하여
이 모든 영화의 감상에 앞서 한낱 종교적 지식의 얕음과 무지에 혹시나 불쾌하실 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생각이겠거니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프롤로그 최근, 살며 유래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공급하는 시기를 보냈다. 그럴 수록 좋은 콘텐츠와 나쁜 콘텐츠의 경계는 사라져갔다. 모두는 좋은 콘텐츠요, 개 중에 나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어떤 작품조차도 누군가의 인생엔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교황’은, 보편적으로도 좋게 판단되거니와 나와 맞느냐하는 질문에서 감히 가점을 준 것이다. 1 ‘교회에 다닌다’거나 ‘크리스쳔’이라는 자그마한 네임태그를 떳떳하지 못하게 달고 있는 나는, 구교에 대해선 더욱이나..
2020.01.06 -
'el-este'
el-este 1. 남성형 명사 (E-) 동(東), 동쪽 [스페인어사전 中] 엘-에스떼. 노르데, 쑤르, 에스떼, 오에스떼.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4방향을 짚어보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그래야만 알 수 있으므로. 새벽 어느 무렵에 출근이라든지 운동이라든지를 하고 있을 무렵이면 해가 움터올랐다. 동쪽에서. 올해의 1월 1일 정확시 12시는 아니었던데 그 해뜰 무렵 내 눈은 그곳만을 애타게 좇고 있었다. 왜? 일출이란건 너무 따듯하니까. 365일 내내 당연히 해는 떠오르는데 그 일출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따듯하니까. 마치 나를 보듬어 안아줄 것만 같은 그 순간을 너도 나도 일제히 기다리는 때가 있다. 아까처럼 새해, 설, 아무개 산에 오른 당신의 때. 모든것의 시작인 그곳은 신비..
2019.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