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2. 16:16ㆍVIDA
아니다.
나는 한국에 살면서 스페인에 있는 꿈을 꾼 한국 사람이다.
으레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쓰곤 한다.
엊그제 잠깐 알맞은 각도로 비춰들어오는 햇살이 만든 알맞은 온도 탓에 낮잠을 잤다. 꿈에서 토레몰리노의 잊을 수 없는 색깔의 해변가 보도블럭을 걷던 나, 주변에는 몇몇 누군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후안마나 시모네는 아니었다. 행인이었나. 그 존재를 인식하려던 차에 바람이 불었다. 따듯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의 결이 너무 생생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미소지으려던 찰나에 어머니께서 만두 삶았다고 깨우시는 그 바람에 깼다. 만두와 엄마의 목소리는 좋았지만 따듯했던 바람과 미소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느끼려 눈을 다시 감았다.
후안마 집은 3층짜리였는데 남정내 세명이 자면서 선풍기 하나가 전부였던 탓에 아침마다 적당히 더운 채로 깨곤 했다. 와중에 그 송글한 땀마저도 기분이 좋았던건 몇 걸음 앞에 있는 지중해에 금방 몸을 던져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후안마 집에서 자다가 느즈막히 일어나서 조용히 해변가에 산책을 나간 적이 있었다. 후안마는 여덟시도 안되어서 진작 크로스핏을 하러 나갔었고 시모네와 덩그러니 남았다가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는 시모네가 괜히 웃겨 좀 보다가 참 평화롭다 느꼈던 소리 흐름에 기분좋게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던 날. 아마 그 날을 모사한 꿈이었지 않을까 싶다.
최근 친구들이 속속들이 취업을 하며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내 걸음의 속도가 내 주변이나 과거의 나에 비해 과하게 느려졌음이 느껴지면서, 나는 이 걸음이 참 마음에 드는데 상대속도를 무시하는 게 불가능하니 내 걸음과 세상의 걸음을 번갈아 보고 그러면 양쪽에 대고 번갈아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끔 시간이 나면 '스페인짱' 카페를 보면서 스페인에서 워킹 홀리데이라든지 아무렴 오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도 보는데, 얼핏 80%가 스페인 생활에 힘들어 하는 걸 보면 내가 과한 꿈을 꾸는건가 싶은 적도 여러번이다.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언제 즈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될 지에 관해 지금으로서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저 막연히 생각해볼 뿐이고, 정도와 벗어난 인생에 평안할 것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란 것만이 확실하다는 걸 깨닫는 지점에서 보통 생각이 마무리 된다.
무섭다. 불안하다.
하는 생각들이 종종 들어오면 이상하리 만치 그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소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의 한 마디 때로는 긴 글. 이 감성의 농도가 오묘하게 다른 경우가 많아 때론 웃기다. 예컨데 후안마나 알렉스가 전해오는 보고싶다는 음성 메시지에는 적당한 술과 새벽이 섞여 정적이나 진지함이 담겨있는데 그게 나에게 낮 시간대에 도착한다. 반대로 내가 그들에 대한 그리움에 메시지를 전할때면 그들이 낮이기도 한데 그러면 이어지는 답변은 가벼운 웃음으로 시작한다. 서로의 그리움과 웃음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음에 간지러운 감정의 순간들이다.
알렉스는 이미 아르헨티나에서 가족이 함께 이민을 왔고,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의 어느 깊은 곳에 외로움을 다루는 법을 스스로 익혀둔 것 같았다. 말투나 눈빛이나 모든 것에 담긴 따스함 그 아래에 베어있는 외로움. 늘 그게 느껴졌다. 헤어진지 꽤 오래됐음에도 연락을 이어가다가 최근 이민자의 외로움에 대해 길게 말해준 덕에 조금 더 폭넓은 감정으로 상황을 이해해볼 수 있었다. 불안감과 동시에 행복함, 행복함과 동시에 불안함. 하물며 그는 스페인어가 모국어임에도.
이 모든 감정을 불식시키는 방법은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일하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코딩을 한 자 더 공부하는 것이 거기로 가는 한 걸음이다라는 질릴법한 주문을 계속해서 외운다. 그렇지 않으면 추억하는데에 감정도 시간도 다 써버리므로. 가치관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게는 몇몇 확실한 가치관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과정은 분명 내게 무언가를 남기고 남은 것은 언젠가 크게 쓰인다는 것이다. 목표가 있다면 돌아가더라도 가긴 간다는 점도 더해진다. 다만 이 과정은 지루하다. 성과는 불투명하다. 언어라는 것은 특히 내가 늘었음을 알기가 쉽지 않아서 분절적인 두개의 시간대를 비교해야하는데, 그게 꽤나 골치이다.
지난 주 내내 몸살감기로 깨나 긴 시간을 앓고 있는 와중에 후안마한테 근황으로 시작해 "really really really miss you"로 끝나는 기분좋은 영상을 받았다. 처음 답장을 스페인어로 시작했더니 후안마가 기막히게 늘었다는 칭찬을 던지면서 이후로 한 시간 가까이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말하고 싶은게 있어도 답답할때, 혹은 후안마가 듣기에 답답할때 영어를 쓰곤 하는데 그날은 스페인어로 얘기했다. 처음으로 후안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의 언어로 할 때 담기는 진정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행복했고, 좋았다. 나 영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감정이 왜인지 벅찰정도로 느껴졌다. 물론 떠듬거리고 잘못되도록 스페인어를 던졌대도 후안마가 잘 받아준 덕일 테지만. 늘었다 정말.
그러니 잘 하고 있는 거다 생각해본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 할 순 없어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반증들이 있고, 그렇게 남은 자국들이 내 삶의 목표에 향해있으므로 잘 가고 있는 거다 생각해본다. 코딩에 조금 더 집중해야할 것 같긴하다만.
다시. 그 바람은 분명히 다른 바람이었다. 실제로 그러했고, 실제로 그러했듯이 꿈에도 그러했다.
단순히 적당한 온도와 습도만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을 감싸는 모든 사람들의 숨소리가 가진 여유와 삶이 묻어나던 그 바람. 또 웃음과 말소리가 가진 사람냄새를 담아내던 바람. 그 바람이 불 때면 이게 삶이지 하는 안도와, 이게 삶인가 하는 조금의 부러움이 바람이 흐른 자리에 남았다.
내가 느끼고 싶은건 딱 그정도의 여유와 그정도의 삶이다. 그걸 다시 느끼려고, 오늘도 발을 딛는 것이지.
한 번 사는 인생 꿈에 살리라. 외친다.
'VID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악, 알고리즘의 축복보다는 (나는 왜 음악을 좋아하냐면) (2) | 2023.04.26 |
---|---|
‘인스파이어드’, 감상이라기보단 인상깊은 부분 요약 (0) | 2023.03.19 |
가장 거대했던,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일 한 해, 2022년 회고 (0) | 2022.12.28 |
유럽연합, 그 공동선의 휴지 (0) | 2022.09.27 |
'다이어트 할 때의 치킨' 전략 (0) | 2022.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