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13. 00:00ㆍVIDA
집에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으면 5층 되는 이 창문 너머까지 올라오는 나무 한그루가 나는 그렇게 좋다. 칠층 어느 무렵까지는 저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떻게 잘 구한 이 집에는 서라운드 창문이 기가막히게 있는데 나무는 그 이국적 뷰에 침엽수가 가진 특유의 이국적 향을 덧대주고 있다. 침대에 누워있을땐 묘하게 투사되는 각도로 그 나무 뒤에 하늘이 걸리게 되는데, 보스턴 어느 오래된 빌딩 속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본다. 하늘이라곤 일체 보이지 않았던 까치산의 네다섯평 남짓하던 원룸을 잠깐 생각했다가 좋지 않은 추억들에 서둘러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고선 겨울에 저 위에 쌓일 눈을 기대해 본다. 겨울이 더욱 겨울 같을 것이다.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반년이 조금 넘었다. 스타트업-이라쓰고 지인들과의 창업이라고 읽는다-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어떤 여정의 끝에서 간절히 구가하게된 것이라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다 감사하게 다가왔고 그러면 행복했다.
이 행복 속에 헤엄치다가 불현듯 내가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어느 환경에서든 쉽게 적응하고 잘도 행복할 포인트를 찾아내는 나는 그 반대급부로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친구와 술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불대다 불현듯, 그재야 알아챘다.
그게 흐려진 것은 오래된 게 아니다. 전역하고 교환학생을 가기 전까지 늘 추구하던 바가 확실했고 그렇게만 잘도 나아가던 인생이란 것이, 교환학생을 기점으로 난잡하게 추동하기 시작해서는 이리저리 뛰쳐나갔고, 그 2022년은 참도 다이나믹했다는 평가만을 남긴채 홀랑 과거라는 이름으로 숨어버렸다. 원치 않은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언컨데, 늘,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왔고 그것들이 난 자랑스럽다.
일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이없게도 아주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PM으로서 썩 정형화된 형태는 아니지만 그건 우리 팀과 우리 회사가 다분히 대기업의 행태를 따르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 혼란과 비체계 틈바구니에서 마주한 역할 갈등은 오히려 큰 규모의 회사에 취직한 20대로서 경험할 수 있는 희소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에 회사가 독자 AI 파운데이션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막연했던 회사의 미래에 그나마 숨통이 틔였으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라는 판이 깔린 것이다.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 협업하는 대상들, 그 외에 맺게되는 인연들. 사람이 참 중요한 내게 지금의 환경은 더할 나위 없다며 끊임없이 자평해대고 출퇴근 길에 비추는 햇살과 바람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그러니 그것은 아니다.
삶에 관한 것이다.
'옳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옳고 아름답다'는 스스로의 개똥철학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다녔던 시기가 있다. 과거의 나라는 놈과 완벽히 같은 결의 생각은 아니지겠지만 선한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여전하다. 선함이 가지는 에너지가 좋다. 그것이 아무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발하는 사람들이 좋다. 직장이라는 환경처럼 주변 사람들이 대규모로 갈음해진 순간은 아마 대학 이후로 처음일 것인데, 나름 성장한 내 시선에서 그 가운데 솎아 보여지는 사람들이 있다. 존경할만한 어른들, 그들과 대화에서 지나가는 문장과 단어 사이에 흩어지는 긍정, 선, 그것을 비추어 살아왔을 삶들. 오랜만에 마주하는 대규모의 서사에 나는 또 좋다. 여전히 나는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구나 한다.
오케이 이제 어떻게 나아갈 것이냐의 물음을 스스로 던져본다. 우선 지금의 삶의 형태가 참 마음에 드는 것은 확실하다. 러닝으로 아침과 한 주를 여는 모양새가 좋다. 재미있는 일을 한다 아주 좋은 사람들과. 아무 영양가 없는 대화만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감성을 가득 적실 소중한 친구들이 있고, 술에 취해 스타트업 정신으로 중무장해 기술과 미래의 얘기를 함께 들쑤실 사람들이 있다. 보고 배울 멘토들이 있으며, 주말에는 도시를 넘나드는 러닝으로 다시 한 주를 닫는다. 성남에서 용인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는 내 최고 힐링이다. 이게 우선 잡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자,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더 다양한 것들을 시도해 볼 필요는 있다만, 하나씩 확실해져 가는 삶의 패턴들이 보인다.
더 멀리, 더 정확히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20대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모양새를 잡아가보자. 전처럼 구체적인 마일스톤들이 될 수도 있겠다. 운동이나 언어 등, 어쩌면 회사가 망해 스페인에 가 후안마가 있는 말라가에서 빵을 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퇴근길에도 연락이 와선 시모네와 주말에 만난다는 얘기를 늘어놓는다. 나도 보고싶다 이 놈들아. 그래 아싸리 라스팔마스나 마요르카에서 관광업을 휩쓸어볼까.
그러니까 결국에 아직 이 페이즈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단서들이 좀 부족한 것이다. 우선 이 페이즈에 도착해있는 다양한 세계들을 만나보자는 생각을 한다. 아무렴 지금도 매주 매달,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인연들을 만나고 또 다른 세계를 알아간다. 재미있고 또 설레기도 한다. 이렇게 새 지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발적인 이야기도 좋다만, 시간이 쌓여 더 깊고 진득한 얘기들을 나누고 싶다. 배울 점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걸 담고있는 수많은 삶들을 알아가는 것은 재미있고 감사하다. 이런 좋은 어른들과 내 상황에서 그려봄직한 좋은 미래들의 다양한 모양새를 많이 만져보고 싶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바뀌겠지만, 이렇게 한 걸음 씩 매일 더 멀리 내 삶을 그려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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