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1. 18:36ㆍVIDA
에어컨을 켜기엔 아쉬운 데에다 이 덥고 습한 느낌을 마지막까지 누리겠다는 마음가짐이었던 것이 화근이었나, 책상에서 일어나 잔에 얼음을 담으러 너무도 당차게 일어난 발에 캐리어가 차였다. 미국에서 돌아와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들에 좀체 어느 계절을 보내고 왔나 맥락 없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을 보는 게 역해서 그 모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캐리어를 정리하는 건 꽤나 큰 일이라 항명해본다. 몇 가지 계절을 뛰어넘고 여름의 초입에 서서 약간은 후덥한 날씨에 선풍기와 얼음 잔에 담긴 커피가 전부인 상태로 옅게 땀을 흘리는 몸이 겨울옷을 만지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더구나 겨울 외투가 채 정리되지 않은 방 안의 옷장에서 다시 또 그것들과 씨름 몇 판을 끝내야 비로소 여름옷들이 자리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니. 그러나 이럴 순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모순'이라는 책의 첫 장에서처럼 불현듯 일어나 이렇게 내 공간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고 몸무림 쳐본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은, 나를 담고 있는 공간을 부리나케 뒤엎는다. 기어코 선풍기를 거부하며 방, 아니 거진 집 청소를 끝내고 텅 빈 캐리어를 잠가 제 자리에 넣어놓는 손이 떨어지자마자 기막힌 고요가 찾아온다. 이제야 정신이 든다. 미국에서의 모든 시간이 꿈만 같다. 물론 새벽에 두 시간이나 됐던 애플의 WWDC를 보고 아침에 대륙 너머에 있는 팀원들과 회의를 하겠답시고 몇 시간 자지 않아 몽롱한 탓이 큰 것도 같지만 이제야 모든 여독이 한 번에 풀린 듯 바깥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사랑하는 은사님의 일터가 사는 곳과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덕에 옛날 고등학생 때 느꼈던 점심시간 산책 바이브를 다시금 소환한다. 내가 작업하는 카페에 오시든지 내가 쌤 한테 밥 한 숟가락 얻어먹으러 가든지, 요 며칠 땡볕 아래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나 기억도 안나게 실없던 대화들이 복잡했던 모든 것들을 평온하게 만든다. 당신 집에서 며칠 씩 지내면서 일하면 안 되냐고 나를 늘 기분 좋게 꼬시어 내지만 집안 상황 탓에 그럴 수 없다 함에도 서로의 상황과 마음은 충분히 주고받았으리라. 더운 날도 헤어질 때면 손을 더욱 꾹 잡아주는 것은 아마 그의 어릴 적 상황과 지금 내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기에 어쩌면 그 시절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일 것이라.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기회 속에서 잘 견뎌내어 나중에 당신께 아무런 근심 없이 밥 한 끼 대접한다면 우리 모든 시간에 핀 열매일 것만 같았다. 아주 달아서 눈물이나 또 흘리겠지.
오늘 회의중에 윌리엄스버그에 있는 사무실에 대해서 지성이 형이 내 마음에 꼭 들 것이라고 한다. 이제 당장 몇 개월 뒤에 나는 뉴욕 어디를 서성거리고 있으려나. 그린포인트에서 하필 맑도록 지는 노을을 커튼 삼아 장엄하게 펼쳐져 있던 맨해튼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나의 것이 아니지만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순간에, 이 청춘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서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듯하게 밥 한 끼 먹고 싶다고, 이 차가운 청춘 한가운데에서 피어났던 꿈의 온도가 기억난다.
청소가 끝나고 잔뜩 부유하는 먼지들을 보며 호원이형이 말했던 '먼지같음'을 잔뜩 느끼게 해 주었던 맨해튼, 그리고 그 안에서의 나, 지금, 그리고 미래 모든 게 겹쳐 더 아득하고 고요하게 느껴졌던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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