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되는 한 해를 맞이한다는 것

2025. 1. 18. 17:53VIDA

새해라는 단어는 인생에 아주 좋은 세이브 포인트가 된다.
 
사실 시간은 굉장히 연속적이니까 작년 아무 두어 달의 시간차와 작년 12월 그리고 올해 1월의 차이는 다를 바가 없을 것인데, 어떤 하나의 묶음으로 뭉게버릴 수 있는 언어적 수단.
 
사업 페이즈를 종료하고 취준을 했고, 취업을 했다. 이 세 문장 사이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으나 빠르게 뭉게버리기로 했다. 너무도 그러고 싶었다. 뭉게진 것들 사이에서 어떤 것들은 간신히 삐져나와 아름답게 남아있으니 그것들만 잘 솎아 남겨보기로 한다.
 
먼저, 내가 하고 싶은 일. 더 크게는 내가 앞으로 직업적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암울했던 취업시장에서 개발자 공고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았다. 길게는 기획쪽으로 가더라도 일단 취업은 해야하니 '취업을 위한 개발자 공부'를 했다.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당근을 비롯한 테크기업이나 LG CNS를 비롯한 SI 회사 등 다양한 회사에 면접을 보면서 직업관에 대해 많이도 흔들렸다. 최대한 '개발자스럽게' 면접을 보면서도, 메이커로서의 역량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다수 면접관의 전언이 있었다. 또 나 역시도, 그 '개발자스러운 척'이 부자연스러워 나대로 면접을 보자니 개발자로서의 깊은 역량보다 프로덕트 전반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는건가 싶은 순간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개발자로서의 역량 부족에 대한 고백이기도하다. 당근의 직무면접 과정이 그걸 굉장히 많이 깨닫게 해주었다.
 
개발자 면접을 거치며 다양한 감정이 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기획 역량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두근거림이 올라왔다는 점이 어쩌면 가장 큰 소득이다. 역시나 프로덕트 전반을 아울러야만 하겠고, 사용자의 손길을 느끼고 싶단다. 그건 알겠는데 신입 기획자를 뽑는 회사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역량과 상황에 대한 아쉬움으로 다가올 추운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의 비련한 주인공 노릇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있을 무렵, NC소프트 Graphics AI Lab에 조직 사상 거의 최초의 PM으로 들어가게됐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채용 프로세스에 지난 삼개월 간의 마음고생이 허무해질 정도였고, 그렇게 합격통보 이후 푹 쉬고선 지난 일주일 첫출근을 했는데 먹어본 대감집 밥은 달라도 아주 달랐다. 0 to 1의 사이클만 죽어라 반복하고 있는 내가 처음 어떠한 체계속에 들어온 것이다보니 (물론 우리팀은 자유 어쩌면 그 이상의 체계이긴 하다만) 어색하기도 하다. 창사 최대의 암흑기에 들어와 구성원들의 다소 떨어진 사기가 조금씩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만, 우선 내게는 구세주나 다름 없으므로 감사히 첫 한 주를 보냈고 앞으로도 그러고자 한다.
 

 
또, 이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었던건 운동 덕분이었다. 그리고 매일 같이 날 수련시켜주신 우리 아파트 헬스장 아저씨. 장갑, 그립, 보충제, 아르기닌, 책. 유형의 것으로 나열할래도 많은데 무형의 것들에서 받은 것들도 참 많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도 건강한 어른에 대한 갈망이 컸던 때에 갑자기 나타나셔서 꺼져가던 긍정의 눈망울을 다시금 채워 넣어주셨다. 성숙하게 사람을 사귈 수 있게된 나이에 만난 인연은 아주 건강했다. 이사오기 전날 즈음 마지막으로 술 한 잔을 함께 기울였는데, 싸주시는 삼겹살 쌈과 소주 한 잔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올라오려는 감정들을 애써 눌러가며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시큰하게 나누는 것으로 한 시절을 매듭지었다. 덕분에 배운 운동에 대한 모든 지식과 방법, 느낌과 감정은 앞으로 평생간 자산이 되어 매번 생각날 것이 분명하다. 건강한 몸을 얻은 것이 첫째, 또 이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들이 쉽게 소화될 수 있었음이 그 시간들에게서 받은 보상이다.
 

 
이제 또 어떤 인생이 펼쳐질까. 올해는 커리어적인 성장을 아주 이루고 싶은 한 해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덕트가 종래에 글로벌 런칭까지 뻗어나가는 청사진을 그려보는데, 그러려면 내가 역량적으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장해도 모자랄 것이 분명하다. 안주할 여유도 아직은 없지만, 어느 때에서라도 이 마음을 간직하며 한 발자국씩 나가고 싶다.
 
여섯시 반 즈음 일어나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긴 출근길을 나선다. 회사에 도착해 운동을 하고 사우나 냉탕에서 정신을 맑게 한다. 올라오는 길에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내 자리에 앉는다. 주변의 멋진 리서쳐 분들이 일하시는 것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팀장님과 티키타카하며 새로운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쌓으며 또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내가 만드는 프로덕트가 AI의 최전선을 달린다는 것에 잠시 가슴이 뛴다. 정시 출퇴근을 해본적이 없는 나는 또 정시 출퇴근이 없는 조직에 들어와서, 아직 창업 정신으로 일하는 방법밖에 모르므로 양껏 일하고 싶은 만큼 일을 한다. 또 연어처럼 긴 퇴근길을 거슬러 올라가 잔잔히 하루를 마무리 해본다. 고작 일주일을 지낸 지금에서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는 삶이다. 이제 이 루틴을 조각해 나가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이겠지만, 우선은 아주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아주 걱정없는 행복감으로, 오랜만에 스페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여유를 품고선 잠에 들었다.
 

 
 
아주 멋진 한 해가 될 것만 같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상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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