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달리기

2025. 6. 7. 18:29VIDA

검색어 하나로 2013년도 즈음 써진 글을 통해 아주 오래된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게 됐다.
 
기록은 2007년 정도에 시작해서 2018년 정도까지 남아있었다. 그 다음 차츰 뜸해진 글은 이젠 더이상 이어지지 않고 있다.
 
2009년 친구들과 당구장 내기를 하던 청년은, 2011년 자기 아이가 태어났을때의 감격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직업의 현재와 미래의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캠핑을 가서 떨어진 밤을 주우면 재밌어하는 삶을 살았다. 일종의 관음인가 싶었던 찝찝했던 시간 후에 쉽게 하지 못하는 기록의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본다. 기록이란 시간이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을 글쓴이 멋대로 잘라 이어붙여내는 것이고, 그럼 무조건 특별한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거나 내 지인이 주인공인 어떤 작품. 지금도 틈틈히 글을 남기는 나지만, 충분히 남겨두겠다 생각해본다.
 
느리더라도 꾸준한 것의 멋짐을 최근 많이 느끼게 됐다. 나아가 느려야만 하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느끼게 됐다.
 
삶의 태도에 정말 중요한 것이 집중력과 지속력이라고 할 때, 그 집중력과 지속력이 내게 있음을, 그것이 나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느린 러닝의 매력인 것이라 생각한다.
 
부심 좀 부리자면 러닝붐이 일기 이전에 보라매 공원에 나가 뛰면서 처음 10km를 뛰어내고, 5분대 기록을 만들고, 며칠 연속 러닝 기록을 경신해냈던 때가 있었다. 홍대병 때문에 러닝붐이 일고는 달리기를 멈췄다가, 최근에 성남 런 페스티벌을 나갔던 것을 계기로 다시금 재미를 붙여 뛰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때부터 최근까지도 더 빠르게 뛰기에만 집중했다. 엄밀히는 더 빠르게 뛰는 것 자체가 러닝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션과 함께를 통해 이영표님이나 진선규님과 같은 분들이 러닝에 대해 가진 관점을 접하고,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얘기를 들으며 러닝 자체가 주는 기쁨에 대해서 집중하고 싶어졌다. 특히나 최근에 매일 5-10km를 아침마다 뛰면서 으레 사람들이 겪듯 장경인대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랑 같이 아침마다 뛰시는 마라토너 사우님께서 천천히 뛰는 것을 보면서 확신을 가졌다.
 
근데 말이 쉽지 천천히 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관성, 내가 원래 달려오던 속도를 아니 만족하지 못하는 속도, 그리고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 비교. 그것이 많은 것들을 불행하게 한다.
 
지난주에 집을 구하면서도 수많은 비교질을 해댔다. 단순히 집에 대한 비교야 해야됐겠지만, 너는 어디 사니, 너는 얼마에 사니, 이 소득은 보통 어디에 사니, 넌 얼마나 저축하니, 생활비는 얼마는 쓰니 등등. 정작 행복해야하는 것은 나인데, 내가 필요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세워야하는 계획도, 내 삶의 크기나 씀씀이도, 그리고 그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가 까지도 남들과의 비교로 정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 그럼 달리던 속도를 높이거나, 내 체력에 맞지 않는 보폭과 리듬으로, 내 체형과 동떨어진 걸음을 하게 되는 욕심을 부린다. 그러면 그건 필연 부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즐기고 내가 행복하도록 하자.
 
첫 10km 대회에서 6차선 되는 공도를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며 고리타분한 '인생은 마라톤' 비유에 넘치게 공감했다. 수많은 스토리를 끌고 이 레이스에서 달리는 사람들, 각자가 가진 수많은 신체적 능력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했을 노력들, 그리고 그렇게 지금 끌어내고 있는 페이스, 마지막으론 그 결과물까지. 모든 것들이 참 인생 같다. 그랬을 때 충분히 따듯한 환경이 내게 주어졌다. 건강히 가야한다. 오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 달리면서 주변의 꽃도 좀 보고, 옆에 사람이랑 얘기도 좀 하고, 하늘도 좀 보고, 이 레이스를 잘 즐기지 않을까.
 

한강으로 뻗어나가는 내 일요일 러닝코스. 한양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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