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3. 16. 13:26ㆍESPAÑA
이들을 만난 건 우연 중에도 참 우연이다.
보통 스페인에서는 EMYCET 이라는 여행 단체를 통해 단체 여행을 많이가고, 시모네의 끈질긴 설득에 나는 결국 이비자를 가게 됐다. 우리는 하엔에서 출발해서 그라나다를 거쳐 발렌시아의 항구에 도착해 거기서 배를 타고 이비자로 건너가는 여정이었는데, 사실 가는 동안에는 무리하게 만들어낸 이비자의 여행 일정 탓에 과제를 하느라 주위를 살펴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 과제는 발레시아에서 이비자로 넘어가는 새벽의 배 안까지도 끝나지 않아 나는 도착한 첫 날 일정 중 밤의 클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정을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운이 좋게도 숙소에 가는 길에 잠시 보라보라 비치에서 허기를 해결할 겸 내리게 됐고, 이탈리아 친구들과 있다가는 엄청나게 맑은 바닷물을 느껴보겠다며 시모네랑 해변을 걷던 와중에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동양인의 관점에서 가족 혹은 사촌끼리 서로 부대껴 안고 있는 것은 꽤나 어색한 일이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스치듯 봤을 때에는 좋은 커플이 여행왔구나 싶었는데 얘네가 맡아놓았던 선배드를 내어주며 튼 이야기에서 사촌인걸 알게 됐다.
별 시덥잖은 이야기였음에도 같은 족속임을 알아챈 우리는 이내 여행 메이트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유를 정말 모르겠지만 그냥 나를 마냥 좋아해줬던 아리아드나 (이하 아리), 내가 스페인어로 욕하는게 그렇게나 좋았던 미겔, 그리고 아리를 좋아한 시모네, 안달루시아 사투리면 미쳤던 나. 모두의 이해관계가 잘 얽혀있었지 않았나.
아무렴 첫 날을 보기좋게 날린 나는 다음 날 해변에 가기 전부터는 잔뜩 흥이 나있었고, 미겔은 옆에서 덩달아 신나서 나한테 그라나다 욕을 또 잔뜩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미겔을 보기좋게 혼내는 사촌누나 아리와 그런 아리가 좋은 시모네. 꽤나 영화같은 꼴로 우리는 해변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다음날 포르멘테라에 같이 가기로 했다.
아무튼 이렇게 적당한 술과 함께 미겔과 해변에 누워, 영어를 못하는 스페인 사람과 스페인어가 미숙한 한국 사람이 처음 여행지에서 만나 나눌 법 한 아무 영양가 없는 얘기들을 실없이 던졌다. 그러다 내가 왜 스페인이 좋은가에 답한 것을 기점으로 사뭇 진지해져서는 경찰에 대한 미겔의 꿈까지 얘기를 나눴었더랬다. 참고로 경찰은 스페인에서 게으르거나 쓸데없이 시비거는 듯한 이미지인데 사람들이 그닥 좋게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아리는 영어를 꽤나 잘 했다. 런던에서 공부를 하다온 탓이었다. 아무튼 참 밝은 에너지와 언제든 주변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미소에 나를 대책없이 좋아해주던 턱에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어디가든 나부터 챙겨주면서 그때그때 나한테 필요한 스페인어를 종종 알려주곤 했는데 이 때 아리가 알려준 스페인어는 지금까지도 잘 써먹고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얘네 집안이 꽤나 잘 살아서 아리 생일에는 보트를 빌려 스노클링을 곁들인 선상파티를 했는데, 여기에 초대받고도 하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순간 중 하나인 소리아의 페리아(지역축제) 기간과 겹쳐 가지 못한것은 두고두고 아쉬울 일이다.
아무튼 우리가 가기로 한 포르멘테라는 이비자에 딸린 또 하나의 작은 부속섬으로 스페인 모두가 꿈꾸는 휴양지 이기도 하다. 이비자에 가기 전부터 시모네와 가기로 작정을 했고 포르멘테라에서는 차 없이 다닐 수가 없어서 국제운전면허증도 튼실하게 챙겼던 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미겔이 자기가 운전하겠다는 바람에 이런저런 걱정없이 넷이서 여행을 꾸릴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포르멘테라의 기억은 여전히 내게 참 빛나도록 남아있다.
포르멘테라에 도착해서 우리는 더 깊은 추억을 아주 진한 사건들과 함께 남기게 되었다. 예컨데 렌터카의 주유구 덮개(캡x)가 달리던 중에 없어져서 한참을 찾다가 결국 배상했던 일이나, 아주 맑고 아름다워 정신이 나가기에 충분했던 해변에서 낮잠을 자고 나서 먹은 점심에서 간에 기별도 안가게 먹고서는 십오만원 정도를 낸 일들 말이다.
아마 이들을 통해 스페인에서 낯선 사람과 얼마나 빠르고 깊게 친해질 수 있는가를 처음 세게 느꼈던 것 같다. 그라나다에서 이들이 먼저 내릴 때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쉬워서 깊게 포옹을 나눴고, 다음날부터도 왓츠앱과 인스타를 통해 꾸준히 근황을 나누며 인연을 이어갔다. 나중에 그라나다의 페리아를 갔을때 집에서 당장이고 뛰쳐나와 만나 또 흥건한 파티를 즐겼던 것까지 그들의 따듯함이 여전히 오감의 무언가에서 알짱거린다.
무엇보다도 그라나다에 진한 추억을 나눈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과, 가족간에 이렇게 서로 표현하고 사랑할 수 있음에 감탄했던 순간들, 그리고 여전히 이들을 통해 나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더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 내게는 참 감사하다.
보고싶은 사람들, 그러나 꼭 다시 볼 사람들.
미겔 그리고 아리아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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