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1. 04:23ㆍESPAÑA
토레몰리노의 해변에서 센터쪽으로 15분 정도를 쭉 따라 올라오면 있는 어느 쇼핑몰 안 터널 같은 곳에 늦게까지 여는 케밥 집 하나가 있었다. 토레몰리노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후안마의 친구가 있었고, 해변에서 빠델을 하느라 한껏 올라온 피로에 젖은 나와 시모네는 후안마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웃지도 못하고 맥없이 케밥집 앞에 있는 테이블에 주저 앉았다.(사실 빠델 때문인지 플라야 산타에서 있었던 광란의 파티 때문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얼추 얘기도 주문도 마친 후안마가 한껏 진지해진 눈썹으로 테이블에 앉더니 멍하니 우리를 바라본다. 진지한 얘기보단 실없이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후안마는 정말 가끔 진지한 얘기를 한층 더 진지하게 꺼내곤하는데 그럴 때 걔 눈에 담긴 슬픔은 어느 역사로부터 나왔는지 상당히 깊었으며, 그 슬픔은 금새 본인의 눈썹에 담겨 그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 전조따나 싶게 시작된 이야기는 3년을 보지 못하고 지낸 아버지, 소중한 친구들과의 이별 등 긴 그의 생애를 지나와 우리의 시간에 도착한다. 한 집에 살았던 하엔에서부터 한 방에 살았던 말라가의 근 한 달까지의 시간들을 되짚어보며 자신의 관계론을 펼친다. 우리가 이렇게 다음달에 헤어지면, 아마 우리는 우리인생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의 91%를 써버린 상태일거랬다. 무슨 스페인식 논리인가 싶다가도 사뭇 진지한 그 자식 표정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
요컨데 우리는 대체로 우리가 대학이든 직장이든 하는 이유로 부모님을 떠나는 그 시점부터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부모님과 보낸, 혹은 보낼 시간 전체 총합의 10%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 직장동료, 어느 활동에서 어느 모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메인 이벤트를 지낸 후 함께하는 시간이 그들과의 전체 시간의 10%면 많은 것이란 거다.
우리는 다음달에 분명 헤어질 것이었다. 나도 시모네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가 정해져 있었고 그러면 그 끝을 알기에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했다. 해변에서 볕에 기분이 좋다가, 빠델을 하다가, 실없는 말장난이건 장난을 치다가도 그저 푸르렀던 지중해를 보며 말이 없어질 때면 각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지껏 잘들 숨겨오던 그 감정들을 솔직히 얘기하던 시간이 바로 그 케밥집에서 찾아왔다. 시모네는 우리가 형제가 아니면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말로 후안마의 연설에 추임새를 불어넣었고 하엔에서부터의 시간을 한 덩이씩 꺼내놓는다. 한참 웃다가는 시큰해지고 또 다른 추억이 꺼내어지고 다시 웃고 다시 시큰해진다.
그래서 결국 후안마는 9%를 지켜내자했다. 한국에 갈거야, 이탈리아에 갈거야, 스페인에 돌아올거야 하는 말들이 분명 진심임에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줄을 다들 알기에, 사실 교환학생하며 마주한 수많은 인연들을 다시는 내 인생에 보지 못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9%도 어쩌면 많은 숫자임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인생의 인연으로 가져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살자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이 그나마의 기회를 더 가져다 줄것이므로. 그렇게 새벽 네시는 되었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골아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제도 새벽에 거의 두시간을 후안마와 영상통화를 했다. 오늘도 공부하다 말고 시모네와 한시간 정도를 이야기를 나누고, 안젤로와 집에오는 길에 통화를 하고 알바로와 마테오와 알렉산드로와 프렌체스카와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씩은 DM이 오고가는 것. 우리는 그렇게 이 가냘프게 그러나 찬란했던 우리의 시간을 지켜간다.
한창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내고 지금의 내가 있었던 데에 큰 역할을 했던 박노해 시인의 '경계'라는 시가 있다. 그 시는 과거를 팔아 살지 말것을 당부했고 내가 해석하기로는 내가 가졌던 과거의 영광이라든지 행복을 추켜세우고 연연하느라 지금 머물러 있지말고 미래를 위해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요즘 매일이고 서로를 추억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오면 나도 그 순간을 회상하고 사진이 저장된 드라이브를 뒤진다. 그 조각을 이어 붙여 영상을 만드는게 요즘의 가장 큰 낙이다. 그 율법에 대한 반란. 이번학기를 버티려면 이번학기만은 이렇게 지내기로 한다.
21학점 수업과 회사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원해서 선택했으므로 후회는 전혀 없다. 귀국 후 지인들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술자리를 전혀 갖지 못하고 크로스핏도 못하며 간단하게도 여행을 다니지 못하는 것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이며 이번학기만 버티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개의치 않는다. 다만 저번주부터 과제와 시험공부가 쏟아지며 많아도 네 다섯시간을 못자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며 체력이 한계에 부치는 것을 느낀다. 여의도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는 동안 출근인파에 몰릴 때면 가장 혐오했던 그림에 갇힌 내 자신에 화가 나고, 지하철에서 졸고 자는 모습만은 연출하지 않으려 난리를 친다. 이렇다면 필연 스페인의 하늘을 떠올린다.
망할 후안마. 엊그제 주말에는 한창 파티를 즐기고 취해서는 연락해서 진심으로 슬픈 얼굴을 들이대며 우리를 추억한다 아이미스유를 난발한다. 누구는 아닌줄아나.
시모네. 틈만 나면 영상통화를 걸어서는 자기 동네를 보여주곤, 등굣길을 보여주곤, 강아지를 보여주곤, 자기 하루를 얘기한다. 지금도 꾸준히 브레샤의 어디 한인마트에서 불닭을 사다간 친구들에게 전파중이다.
최대한 떨어져있음에도 이어져 있으려 다들 발악한다. 9%가 9%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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