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어느덧 벌써 열 네 개의 주말을 맞았다. (길게 쓰려던 생각은 없었지만 엄청 길어진 글)

2022. 4. 24. 04:20ESPAÑA

더이상 이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인스타그램에 남기기엔 번잡스럽고 페이스북은 쓰질 않으며 유튜브 영상을 만들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백 년 만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글을 정제하거나 할 노력을 기울지 않고 그냥 생각이 흐르는 대로 적어가보려 한다.

 

내 방의 테라스 풍경, 인위성 짙은 사진이지만 낮에 찍은 사진은 이게 전부인 것 같다.

 

 

2022년 4월 23일 토요일.

 

날은 어제와 다르게 깨나 좋다. 어제 그렇게 내리흐르던 비는 2층 내 방 테라스까지 가지를 뻗은 오렌지 나무의 잎에나 그 흔적을 남겼지 온 데 간 데 없다. 내 창에서 이런 날 딱 이 시간이면 반대편에서 지는 해가 오렌지 나뭇잎을 뚫고 창으로 들어오는 건 어디 영화에 실어도 모자라지 않을 장면이 분명하다. 방금 막 후안마랑 걔 방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안젤로랑 시모네가 장난치는 탓에 분위기가 완전히 어그러졌다는 핑계로 1층에 내려와 시리얼로 허기를 달래며 공부를 마친다. 그냥 허기를 달래고 싶었다는 말이다. 공부도 끝내고 싶었다는 말이고.

 

약간 어둑한 부엌에서 굳이 불을 켜지 않고 시리얼을 먹다가 어제 크로스핏 끝나고 걸어오는 길에 지금의 상황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던 걸 다시금 상기하고는 문득 내 방으로 올라와 블로그를 열었다. 아마 어둑한 분위기와 대조되어 밖에서 들려오는 애들과 강아지, 새소리에 한껏 감성이 올라온 탓이었을 거다.

 

아무튼.

 

매일이 벅차다. 마냥 좋은 건 아닌게 양가적 의미를 모두 갖기 때문인데, 행복하여 벅차고 또 시간의 압박이 벅차기도 하다는 말이다.

약 삼 주간의 온보딩을 거쳐 스페인에서 프리랜싱 하는 일을 구했다. 사실 일적으로 로드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닌데, 어쨋든 루틴을 갖는 하나의 스케줄이 주간 열 댓 시간을 가져간다는 것은 어느정도 피로를 요구한다.

물론 벌이가 굉장히 좋은 사이드 허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십원 한 장을 부모님께 받지 않고 온 이곳에서의 삶이 조금은 더 길고 윤택해지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에 시작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감내할만한 피로다. 아무튼 여기에 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의 수업을 어쩌다 신청했던게 시작해서 꽤나 난도 높은 보고서를 한 달 내내 제출해야하며 곧 시험기간 탓에 팀프로젝트와 공부가 슬슬 시동을 걸리고 있는 등의 모든 상황들이 몰려왔다. 그러므로 벅차다.

 

보면 참 욕심도 많다. 군대에서 대뜸 지가 사랑한다는 소프트웨어를 하겠다며 개발의 길로 들어가서는 이 길이 내 길이라며 오만갖 행복하더니, 이제 스페인에서 갖가지 과분한 행복을 겪은 후로 내 머리 속에서 행복과 자유에 대한 사고회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 정말로 내가 뭘 해야될지 모르겠다. 가만보면 스스로가 참 야망이 있는 것 같다가도, 유유자적하고 싶어하기도 하고 전에도 종종 스스로가 이런 점에서 참 줏대없다 생각이 들때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 절정이지 싶다. 의식주부터 시작해서 말그대로 "모든 게" 바뀌었기 때문에 생각의 흐름이 바뀌는 것도 참 당연한가 싶다가도 그 흐름을 잠깐 멈추고 가만 되짚어보면 퍽이나 웃길 때가 있다. 전의 나와 참 이질적이라서.

 

여기까지 썼는데 후안마가 방으로 들어와서 아래에서 맥주마시면서 칠링하자 그래서 그러겠다 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모먼트. 갔다와서 이어 써야겠다.

 

되게 간단해보이지만 저 패티의 간을 잘 하는 게 중요한데, 후안마는 그걸 참 잘한다. 내가 하면 별로 맛이 없다.

최근에 스페인에 더 남느냐 마느냐로 깨나 골치가 아팠다. 주변의 나의 어른들에게 많은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런 상황을 선험했던 사람이라는지 혹은 미래에 대한 구상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두루 들으며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으나 쉽지 않던 시간이었다. 고민의 골자는 이런 거였다.

 

나는 스페인에서의 삶을 너무도 사랑한다. 지난주부턴가 이제야 말문과 귀문이 트이기 시작해서 얘네가 하는 말을 이제 적어도 "들을 수는"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 세상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들의 달콤함과 아름다움 또 각박한 삶이나 더러움까지 보았음에도 내 줏대가 뿌리 째 흔들렸다할 정도로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기가 사랑해서 왔는데 더 사랑하게 될 줄이야. 감히 고작 스물 다섯 살에 확신컨데 돌아가면 이런 삶은 절대 앞으로 내게 없다. 한 발 빼자면 있기 힘들 것이다. 이 젊음 속에 이 자유 속에. 일상부터 큰 여행까지 내게 매일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여기 같이 함께 하는 스페인놈과 이탈리아놈의 마인드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록 아름답다. 이들과 이들 주변으로부터 파생된 이곳을 사랑하여 이 곳을 더 이들의 시선에서 보게 되면서만이 느껴지는 이 아름다움은 매 순간이 과분하다 느껴지도록 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없을지 모를 순간에도 이곳을 사랑할 이유들을 본다. 물론 함께 한다면 얼만큼 더 행복하겠느냐만은.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나는 살며 이런 선택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낭만과 현실로 모든 것을 이분화하기는 싫지만) 내가 여지껏 해온 낭만의 선택은 적어도 거시적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는 미시적 순간의 선택이었을 뿐이며, 크게 보면 현실적인 나의 인생계획이 바뀌었다거나 그것이 위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예컨데 소프트웨어를 공부하겠다 마음을 먹었을 때에도, 인공지능을 하겠다 마음을 먹었을 때에도 적어도 그것의 실패가 모든 것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선택과 같이 지금도 내가 그것을 하고있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너무 뛰지만, 이 선택은 거시적으로 내 미래를 바꿀 것만 같고 실패(여기서 실패가 뭔지 정말 모르겠지만)는 큰 패착으로 남을 것만 같다. 다시말해 무섭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선택은 내게 처음이고 그래서 어떠한 응원이나 격려나 조언도 참으로 감사하기만 할 뿐 내 선택을 가로하진 않는다. 예컨데 번지점프대 끝에 선 고소공포증을 가진 사람에게 이렇게 하면 더 잘 뛸 수 있다는 등, 저렇게 하면 덜 무섭다는 등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니까 뛰긴 할건데 내가 뛸 수 있을지 뛰고나서 무슨일이 일어나진 않을지 하는 오만 걱정들이 나를 자꾸만 뛰는 데에 망설이게 한다.

 

답이 없는 고민이기에 참 "이렇게 하겠다"는 명확한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고 또 고민이 닥쳐올 때마다 생각이 깊어져 주변 올리브 나무에 눈을 돌리곤 한다. 크로스핏 하는 사람들에게 괜히 부족함을 잔뜩 담은 스페인어로 말을 건네고 그들의 웃음과 대화가 이어진다는 사실에 만족해한다. 괜히 예쁜 풍경이나 하늘의 색에 도취해보며 이곳에 사랑 한 결을 더 건넨다. 이 시절을 끝내야하는 이유도 알지만 돌아오는 길에 있는 큰 공원에서 강아지마저도 어떠한 울타리 없이 공만을 따라 한계없는 자유로움에서 달리는 것을 보면서 자꾸만 한 걸음씩 나는 남는 선택으로 걸어가게 된다.

 

누군가의 여섯 살 맞이 생일파티다

 

어떻게 하면 네게 이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 걱정어린 표정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매일 스페인어 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남게 되든 돌아가게 되든 내가 이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이들에게서 들은 말과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걸어가는 길에도 스페인어만 듣는다. 무엇보다 이 언어가 좋기도 하다. 단순 언어의 개념을 넘어 정말 소리나 말씨 자체가 좋다는 말이다. 인종차별까지 당해본 적도 없지만서도 소위 마이크로 어그래션이라 일컫는 눈빛이나 표현을 간혹 느낄 때마저도 온전한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이 내게는 사무칠 뿐이다. 지금 내게 혹자가 이것을 "취했다"고 하거나 "뽕"이라고 한들, 완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상관하지 않겠다는 오만방자한 태도는 지금 내게 필요하지도 않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해야될 것도 많고 그래서 하고싶은 걸 온전히 못하기 시작한지가 좀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자유를 누리는 만큼 혹은 권리를 누리는 만큼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하기에 그게 크게 힘들다거나 불만이진 않다. 그냥 정말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싶을 뿐. 해야할 것들에도 나름 만족하는 중이다. 아무렴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것들 사이에서 그럼 나는 스페인에 더 남을 수 있겠느냐.

 

결론적이자 또 근본적인 고민은 결국 내가 얼마나 내 낭만을 추구해도 되는 걸까 하는 것이다. 굳이 낭만과 현실을 이분화해야할까. 낭만이 현실일 수 없을까 혹은 그녀의 말처럼 낭만을 쟁취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조차 우리의 용기이자 아름다움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은 생각을 낳고 결국 로직은 엉켜서 다시금 어제 봤던 올리브 나무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올리브 나무를 본다.

 

이제 내가 조금 더 아는 것은, 대체로 50대 이상의 스페인 사람들은 장 볼때 카드보다 현금을 많이 낸 다는 것과, 과일 고를때면 늘 비닐장갑을 껴야되는데 그것때문에 돈 꺼내는 걸 늘 불편해한다는 것. 유럽애들은 잘 안씻는다는 매커니즘이 어떤 생활패턴으로부터 나오는 결과인지와 있는지도 몰랐던 거리의 음수대에서 물마시는 것을 즐긴다는 것. 여전히 문화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강성하고 굳건하다는 것과 여전히 한국이 그리 큰 존재는 아니라는 것. 안달루시아의 사투리가 대체로 어떻게 발음되기에 내가 듣지 못했으며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체득하여 매커니즘을 느낌으로 느낀다는 것. 어마어마해보였던 그라나다는 이제 옆동네일 뿐이라 원하면 '마에 웨스트'에 가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는 것. 야오야오의 토핑은 석류를 넣어야 제 맛이라는 것과 뽀론과 뽀라스와 보떼욘 등 여기서 살지 않았으면 몰랐을 단어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생각보다 3월의 스페인 날씨는 별로라는 것. 낮에 아무리 더워도 그늘은 겨울과 다름없음으로 외투를 챙겨야 한다는 것. 해변에서 너희가 즐기는 일상을 즐기기위한 준비물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들. 매일 매일 수많은 것들을 마주하고 알아가는 동안 나는 스미어든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사랑한다.

 

피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피할 수도 없다. 벌써 4월도 다 지나가고 있고 결정의 시간은 주저없이 내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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