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2. 02:06ㆍESPAÑA
아침에 일어났을 때 후안마에게서 몇통의 음성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으레 그렇듯 내가 알려준 북한 말투를 보냈으려나 했지만 그렇다기엔 꽤 길었다. 당장 등굣길이 멀었으므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읽지 않은 메시지의 설렘과 함께 유독 좋은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본 후에야 그 메시지를 들었다.
내용인 즉슨 본인이 지금 스페인 북부의 빌바오를 여행하는 중이며 그곳 알베르게(우리나라로 치면 민박, 산장 그 어느 중간 즈음의 시설)에 묵는 중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는 것이었고 그 뒤로는 또 몇몇 시덥잖은 얘기들이었다. 시때가 맞아서인지 그렇게 몇통의 음성메시지를 주고받다보니 등굣길은 순식간이었다.
그를 통해 본 빌바오의 바다는 스페인의 여느 북부 바다가 그렇듯 그저 맑았다. 하늘은 또 그렇게 맑았다. 늘 내가 스페인에 있으면서 눈 앞에 두고도 믿기지 않았던 그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다. 영상통화가 늘 그렇듯 좋지 않은 화질임에도 그 색깔만은 또렷했기때문에 감탄하던 나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스페인에 있을때와 같이 후안마는 줄곧 어디든 갈때마다 "너가 여기 있어야되는데", "너가 여기 좋아했을텐데" 한다. 그 말이 내게 얼마나 고마운지 네가 알까 싶다. 오랜만에 한 영상통화에 끊기를 가슴아파하던 너의 액션이 웃기면서도 또 시큰하다.
우리는 헤어질때 다시 만날때 까지 다시 만날것을 위해 서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자했다.
너는 여전히 참 너다운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무심한듯 자연에 감탄을 던질 줄 알고, 내게 별이 얼마나 아름답느냐 물을 줄 알았던. 네 사랑을 그렇게나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이 주는 사랑을 받을 줄도 아는. 라티노 아니랄까봐 여자도 참 좋아하던 너. 당장 내일 스스로가 어디있을 줄 어찌아냐 내게 항변하던 너는 여전히 내일모를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나만의 여행을 하고 있다. 오르챠따와 모르시야, 너희 어머니가 아침에 때때로 해주시던 또 내가 발이 크게 다쳤을 때 네가 직접 만들어온 세상 최고의 살모레호, 값싸면서도 달긴 그토록 달았던 수많은 과일들이 그립다.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 사이즈 맞지도 않는 슬리퍼 질질끌며 가던 톨레몰리노의 해변이 그립다. 나의 여행은 이것들을 뒤로하면서도 이것들을 다시금 찾아가는 여행이다. 꽤나 계획적이기만 했던 나의 인생은 이제 너처럼 방향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질주를 시작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살아가는 것 뿐이니까. 오늘도 학교가는 길에, 하교하고 회사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페인어를 듣는다. 내가 스스로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아무리 바쁜 나날을 살더라도 스페인어 공부는 놓지 않기로 했던 그 약속을 지키려고, 그래서 너와 네 어머니와 알렉스와 하비와 아리아드나와 훌리아와 알바로와 엔리케, 끝까지 나열할 수도 없는 그 수많은 이들과 한 마디 더 나누려고, 이유없이 너희가 준 사랑을 다시 돌려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행복한 시간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두 차례의 큰 태풍이 가고 비로소 가을이 오려나보다. 오늘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서던 길과 일끝나 회사를 나오던 모든 때가 쌀쌀했다. 쌀쌀한 만큼 날은 맑았지만, 스페인의 그것만큼 맑진 못했다. 오늘같이 맑은날 네가 계속 보내온 음성메시지에 나는 또 그날들을 떠올리고, 흐린 하늘에 전해지지 못하는 우리말들을 이렇게 적어내려가며 그 그리움을 풀어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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