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AÑA(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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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그 사촌들
이들을 만난 건 우연 중에도 참 우연이다. 보통 스페인에서는 EMYCET 이라는 여행 단체를 통해 단체 여행을 많이가고, 시모네의 끈질긴 설득에 나는 결국 이비자를 가게 됐다. 우리는 하엔에서 출발해서 그라나다를 거쳐 발렌시아의 항구에 도착해 거기서 배를 타고 이비자로 건너가는 여정이었는데, 사실 가는 동안에는 무리하게 만들어낸 이비자의 여행 일정 탓에 과제를 하느라 주위를 살펴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 과제는 발레시아에서 이비자로 넘어가는 새벽의 배 안까지도 끝나지 않아 나는 도착한 첫 날 일정 중 밤의 클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정을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운이 좋게도 숙소에 가는 길에 잠시 보라보라 비치에서 허기를 해결할 겸 내리게 됐고, 이탈리아 친구들과 있다가는 엄청나게 맑은 바닷물을 느껴보..
2024.03.16 -
유럽은 내게 더이상 멀지 않아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릴적 작은 시골에 살며 만난 친구들, 그리고 교환학생을 하며 만난 친구들. 이렇게 계속 유럽의 친구들과 매일같이 연락하고 또 유럽에 돌아가겠다 생각한다면 난 누구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자기객관화를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통 그게 힘들다. 내가 스페인을 좋아하는 이유에 이성적인 이유가 확보되어 있던가. 순 감성으로만 점철되어있지 않은가. 또 그러면 어떤가. 등. 스페인에서 돌아오기 직전에도 몇 백 킬로미터는 되는 거리를 마음먹으면 순 왔다갔다했던 시기들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때에 거리가 멀다는 개념을 지워버리자 했다. 사실 다 마음먹기 나름이지 않은가. 우리나라처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도시든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나라도..
2023.03.08 -
마테오, Good Vibes Only
러브펑크, 씨엔몬타디또, 베르게스. 늘상 후보군에 오르곤했던 펍이 지루하게 느껴질때면 비블로스로 향했다. 비블로스는 이상하게 갈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곤 했는데 아마 마테오가 그 첫 인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처음엔 나이가 꽤 되어 보였으므로 무리 중 같이 있던 여자애들에게나 추파를 던지는 30대 아저씨인 줄 알았고 그 인상에 그 펍 내내 내겐 괜히 못미더운 존재였다. 이 날은 같이 온 다른 친구들보다도 유독 프란체스카와 별안간 이상한 얘기를 다 나누며 한창 가까워지고 있던 날이었고, 계속 옆을 기웃거리던 그가 조금은 성가셨던 것 같다.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상태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몇 분 채 흐르지 않아 안젤로였나 다니엘레였나 둘 다 였나 담배피러 ..
2022.11.08 -
91%와 9%의 시간
토레몰리노의 해변에서 센터쪽으로 15분 정도를 쭉 따라 올라오면 있는 어느 쇼핑몰 안 터널 같은 곳에 늦게까지 여는 케밥 집 하나가 있었다. 토레몰리노의 모든 곳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후안마의 친구가 있었고, 해변에서 빠델을 하느라 한껏 올라온 피로에 젖은 나와 시모네는 후안마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웃지도 못하고 맥없이 케밥집 앞에 있는 테이블에 주저 앉았다.(사실 빠델 때문인지 플라야 산타에서 있었던 광란의 파티 때문인지 정확하지 않았다) 얼추 얘기도 주문도 마친 후안마가 한껏 진지해진 눈썹으로 테이블에 앉더니 멍하니 우리를 바라본다. 진지한 얘기보단 실없이 농담하기를 좋아하는 후안마는 정말 가끔 진지한 얘기를 한층 더 진지하게 꺼내곤하는데 그럴 때 걔 눈에 담긴 슬픔은 어느..
2022.10.21 -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아침에 일어났을 때 후안마에게서 몇통의 음성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으레 그렇듯 내가 알려준 북한 말투를 보냈으려나 했지만 그렇다기엔 꽤 길었다. 당장 등굣길이 멀었으므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읽지 않은 메시지의 설렘과 함께 유독 좋은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본 후에야 그 메시지를 들었다. 내용인 즉슨 본인이 지금 스페인 북부의 빌바오를 여행하는 중이며 그곳 알베르게(우리나라로 치면 민박, 산장 그 어느 중간 즈음의 시설)에 묵는 중에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는 것이었고 그 뒤로는 또 몇몇 시덥잖은 얘기들이었다. 시때가 맞아서인지 그렇게 몇통의 음성메시지를 주고받다보니 등굣길은 순식간이었다. 그를 통해 본 빌바오의 바다는 스페인의 여느 북부 바다가 그렇듯 그저 맑았다. 하늘은 또 그렇게 맑았다. 늘 내가 스페인..
2022.09.22 -
스페인에서 어느덧 벌써 열 네 개의 주말을 맞았다. (길게 쓰려던 생각은 없었지만 엄청 길어진 글)
더이상 이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인스타그램에 남기기엔 번잡스럽고 페이스북은 쓰질 않으며 유튜브 영상을 만들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이렇게 백 년 만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글을 정제하거나 할 노력을 기울지 않고 그냥 생각이 흐르는 대로 적어가보려 한다. 2022년 4월 23일 토요일. 날은 어제와 다르게 깨나 좋다. 어제 그렇게 내리흐르던 비는 2층 내 방 테라스까지 가지를 뻗은 오렌지 나무의 잎에나 그 흔적을 남겼지 온 데 간 데 없다. 내 창에서 이런 날 딱 이 시간이면 반대편에서 지는 해가 오렌지 나뭇잎을 뚫고 창으로 들어오는 건 어디 영화에 실어도 모자라지 않을 장면이 분명하다. 방금 막 후안마랑 걔 방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안젤로랑 시모네가 장난치는 탓에 분위..
2022.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