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교황(The Two Popes), 진리에 관하여

2020. 1. 6. 19:55VIDA

 

이 모든 영화의 감상에 앞서 한낱 종교적 지식의 얕음과 무지에 혹시나 불쾌하실 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생각이겠거니 이해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프롤로그

 

최근, 살며 유래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공급하는 시기를 보냈다.

그럴 수록 좋은 콘텐츠와 나쁜 콘텐츠의 경계는 사라져갔다.

모두는 좋은 콘텐츠요, 개 중에 나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어떤 작품조차도 누군가의 인생엔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교황’은, 보편적으로도 좋게 판단되거니와

나와 맞느냐하는 질문에서 감히 가점을 준 것이다.

 

 


 

1

 

 

‘교회에 다닌다’거나 ‘크리스쳔’이라는 자그마한 네임태그를 떳떳하지 못하게 달고 있는 나는, 구교에 대해선 더욱이나 얕은 지식을 자랑한다.

언젠가 한 번 뉴스에서 교황의 선출때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의 연기가 흩날리는 장면을 보았다. 아,  굳이 치사하게 굴어본다면 각 동네마다 꼭 하나씩 성당이 있다는 것까지도 안다.

추기경과 사제가 어떤 역할과 어떤 역학을 가지고 있는지에는 하나 아는 것이 없는 정도로의 무지.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으로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면서도 종교에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어릴 때 나는, ‘’어렵고 아픈 상황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단언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하느님께서 왜 그들에게 고난을 내린 것인가” 했다.

예컨데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태어나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매 하루가 생존의 연속이거니와 온전히 성장했다하더라도 전쟁과 각종 성범죄에 노출된다.

현생은 후생을 위한 준비라든지 혹은 이겨내야할 고난으로 묘사하는 몇몇 양들의 말을 들었으나 썩 달갑진 않았다.

아무렴 지금에 고통받고있는 당신들에게 신은 그토록 무심하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신이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 쯤 되었다.

모든 이들을 보듬어주면서 넒은 포용력으로 자신의 울타리를 넓여가야했지 기어코 자신만의 울타리에 그들을 들어오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예컨데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아마도 비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과부는, 동성애자는 왜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에 대해서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워야하는 신께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셨다.

엄밀히는 사랑을 받을 자격은 있으나 그들이 회개한다는 전제를 단다.

회개는 이때에 잠깐 과학과 같은 모습을 한다.

그러니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다면, 유전자가 나아가고자하는 방향, 다시말해 자기복제자의 수를 늘리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걸 죄라 부른다.

 

 

 

2

 

 

최근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고민했다. 아니 그 근원을 탐구하다 보니 그 이전에 악은 무얼까부터 알아야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선과 악은 지독히도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마치 진보와 보수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더욱이 답답한건 보수-진보의 개념처럼 좌우측의 1차원 적인 공간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보다 오른쪽으로 보면 그나마 더 보수적인 사람. 한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개념이라는 거다.

그니까 나보다 더 선한 사람, 나보다 더 악한 사람은 결국 내가보기에 그럴 뿐이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누가 그걸 판단하느냐에 따라 객관적 수치마저도 바뀌었다.

나에게 엄청난 선은, 너에게 엄청난 악일 수 있다.

선과 악은 결국 관찰자가 상정한 절대선의 방향에 달려있다.

 

 

 

3

 

 

최근 내가 속한 부대에서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현상을 관찰하면서 꽤나 재미있는 모습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과정은 지루하므로 각설.

결론적으로 정원 10명 남짓한 이 작은 부대에서 조차 오래간 뿌리내려온 문화를 뒤집는 데에 어떤 희생이 필요했고

심지어 개혁을 원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사람과, 온건한 개혁을 원하는 사람으로 나뉘며 작은 역사가 현현하는 모습을 봤다.

이토록 작은 집단조차 이렇다.

교회가 가진 역사는 변화를 거부한다. 종교인 관점에서라면 막는다는 표현보다 역사를 수호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종교란 진리를 상정해두고 그것을 좇는 데에 충실하니까. 그 시대 그 집단이 믿는 진리에 변화를 가한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깥에서 보면 고지식, 안에서 보면 숭고.

나쁜걸까? 아니다. 아까 말했든 선과 악은 결국 관찰자가 상정한 진리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4

 

 

드디어 영화를 돌아본다.

이 영화는 전, 현 교황이 동시 존재하고 있는 아주 귀한 시대를 조명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말이다.

두 교황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과, ‘프란치스코’ 현 교황은, 교황의 권위부터 천주교의 방향성까지 모든 면에서 다르다.

교회가 과부나 동성애자를 품어내야하는가? 교황의 눈높이는 어디에 있어야하는가? 격식은 고작 형식인가 혹 내재하는 의미의 상징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종교는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변화하지 않는 집단이기에 혹자가 한 가치관에서 종교와 마찰을 빚는 다면 그 자가 떠나는 것이 맞아보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중을 설득하려는 절, 절은 바꿔보려는 중. 그 둘의 황홀한 토론이 이 영화의 전부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영화에 불교의 비유를 갖다 댄 것은 넌센스다)

결판은 나지만 누가 이기지 않았다. 끝까지 어떤 가치관이 옳지 않았다.

둘 중에 역사는, 그리고 교회는 한 방향을 선택해야했지만 그 둘 다 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결국 다른 방향은 엉겁의 끝에는 예수라는 하나의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본다.

그리고 끝내 그 진리의 모습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따듯한 

 

몇가지 종교에 대해 가진 불편함들을 씻어내 준 영화였다.

무조건적인 숭배를 할 게 아니라 신과 나의 관계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도 좋다고 숨통을 틔워줬다.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는 다를 수 있기에 나의 진리는 불변의 진리가 아닌 그저 보편타당한 진리이다.

혹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가 같아도 거기에 가는 방법은 너무도 다양해서 서로를 존중해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아름답다.

그리고 나의 것이 아무리 옳아 보일때조차 

 

그건 틀릴 수 있다.

 

 

 

 

 

 

내가 감히 생각했던 종교의 한계를 깨부수어주어 참 감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