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거대했던,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일 한 해, 2022년 회고

2022. 12. 28. 21:07VIDA

매번 하는 한 해의 회고이지만, 올해 회고는 유독 남다를거란 걸 한 해 내내 알았다.

 

올해는 딱 반으로 나뉜다.

 

매일 아침 아직 나는 자고 있을 때, 후안마가 출근하기 전 내 방에 들러 한숨쉬며 들이치는 햇빛을 막으려 페르시아나 내리는 소리를 듣곤 어스름하게 깨던 아침. 안젤로가 트는 음악소리가 좋아 부비적거리며 일어나던, 그러다 슬리퍼 끌고 시모네 방으로 들어가 나폴리타나랑 커피 마시러가자던 그 아침의 날들. 크로스핏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엔의 기차역 앞에 드높이 솟은 나무 탓에 갈라지는 하늘빛을 보며 이게 여유라고, 이게 숨쉬는 것이라고 분명히 알았던 절반의 한 해.

 

가장 싫어하던 여의도역에서 매일 환승인파에 부딪히며 추운 날에도 체온으로 금세 달궈지는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이고 겨우 내 틈을 만들어가던 아침. 내 의지도 아닌채로 9호선으로 환승하러 오르던 계단과, 까치산의 언덕. 하루도 쉼 없이 타임어택을 해야만 했던 과제와 그 틈에서 내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할애해야했던 등하굣길의 지하철이라든지 07772에서의 시간. 특히나 21학점과 회사를 병행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과신이었음을 깨달아갔고, 매일 세 네 시간을 자야했던 건 분명 수험생활만큼이나 체력적으로 부담됐다. 최악이래도 과하지 않았을, 그랬던 절반의 한 해.

 

이 한해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절반의 한 해
또 다른 절반의 한 해

 

스페인에서 돌아오고 남은 절반의 학기가 시작되며, 모든 건 내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채로 흘러갔다. 영우와 원상이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내게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든, 내가 얼만큼 좋아하는 사람이든, 내가 필요로하는 사람이든 그 누구든, 구태여 노력을 들여 만나야하는 만남은 내게 사치였을 뿐이다. 그 어떤 술자리도, 그 어떤 만남도 그 아무것도 내게 허락되지 않았고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게 내 삶의 전부였다. 과제, 과제, 학교 공부, 스페인어 공부와 코딩공부 그리곤 다시 과제 혹은 시험공부.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따분한 내 상황을 상기하며 설명해야하고, 거절 뒤에 오는 장난과 걱정과 속상함과 애정이 섞인 투덜거림이 더이상 부담스러워 연락도 받질 않게 됐다.

 

하루는 과제를 하다가 갑자기 안젤로에게 영상통화가 왔던 날이 기억이 난다. 그 맑은 알타무라의 하늘을 배경으로 길가에 난 무화과를 따서 보여주는 안젤로를 보며, 내가 스페인에서 느꼈던 '공간만으로 달라지는 인생'에 대한 역겨운 감정이 다시금 올라왔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꾸려가는 삶을 살아가고야 말겠다 다짐했던 말라가의 해변에서의 다짐은 어디에 가버렸나. 어느새 싫어하던 빽빽한 지하철 군중의 한 머리꼭지를 담당했고, 그 안에서 졸음하는 사람들의 기구한 삶에 대한 연민을 가진다든지, 이미 가득찬 차량에 어떠한 감정을 싣지도 못한 얼굴을 가진채 몸뚱이를 기어코 들이미는 아무개를 보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 그 하루는 엿같음으로 점철되기 마련이었으므로 흑석역에서 정문에 이르는 길에 아메리카노로 꾸역이 눌러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안젤로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키위의 이름이다.

이러한 한 학기는 앞선 반 해의 극한의 행복이 남기었던 트라우마와 잘도 맞아 떨어졌다. 하루가 끝나고 까치산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 집에 도착해 불을 켜면 5평 남짓한 한 눈에 들어오는 공간은 오렌지 나무 걸친 테라스를 가졌던 하엔의 내 방이 덧대어질 때 최악의 감상을 남겼다. 산책이나 해볼까 바깥으로 나가면 틈도 없이 겹쳐진 빌라에 가려진 하늘이 먼저 나를 짓눌렀다. 어디서든 광활한 하늘을 볼 수 있던 하엔이 겹친다. 다시 기분은 안 좋아진다. 신림의 모텔이 둘러싸던 내 자취방을 나설 때 느꼈던 도시 속의 역함이 오버래핑되고, 살아가야하는 이방인에게 서울은 그런 곳인건가 했다.

 

그러다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한 건 시월의 어느 하루였다. 내게 사랑이 없었다. 늘 모든 것들을 사랑하던 나다. 그러한 군중이 서울을 꾸리는 것임에 웃음을 지었을 것이고, 아메리카노가 차갑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또 한 걸음, 또 하루를 디뎠을 나다. 그러던 게 무언가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없어졌음을 깨닫고는 적잖이 충격받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남은 한 학기를 바꿔놓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내 삶은 그 굴레에 갇히지 않을 수 없었다. 깨달았던 날에도 내 미리알림 목록에는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였고, 그날도 자정까지 마감해야하는 과제가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내용도 줄지를 않았다.

 

그런데 황당한 점은 전혀 우울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때때로 치미는 분노든, 억울함이든, 시간에 대한 압박이나 부담스럽다는 대개의 부정적인 정서들은 사실 내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명확했고, 짜증나는 이 상황들이 결국 그곳을 가리키고 나아가는 데에 필연적임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내게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월드컵을 볼 때에도 전후로 과제를 해야했지만 그런 상황을 아무 이유없이 받아주는 영우가 있었고, 요즘 일한다고 정신없을 영우가 혹 시간이 나서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을 하는 동안 옆에서 과제하는 내 모습은 그저 대학생의 전형이 아닌가 싶었다. 무엇보다도 원상이 덕에 대학 생활의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학기의 시험기간은 찬란했다. 시시콜콜하게 농담따먹기나 하며 또 우리만의 이야기와 우리만의 낭만을 그 틈 속에 가득 채우는 것들은 결국 모든 것을 그저 흐르도록 하는 윤활제가 되었다.

 

언제나 최고의 뷰를 선사하는 경영경제관 옥상

 

그 외에도 컴공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레 프랑스 친구들과 친해져 팀플을 하고 그들과 나누던 대화, 아무런 대가 없이 다가와 숱한 친절을 건내주었던 몇몇 컴공의 친구들. 또 바쁜 척 다 하는 상황의 나를 끝까지 이해해주고 응원해주었던 나의 따스한 사람들. 그들이 건네는 한 마디의 응원과 이해와 따듯함. 상황만은 최악이었다 말하고 싶은 때에도 사람에 느끼는 따스함과 그 따스함이 주는 힘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럼에도 2022년은 내게 가장 소중하며 가장 거대한 해임이 분명하다. 스페인은 나를 바꾸었다. 내가 가야할 길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리한 길에 대해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던 게 가장 크다.

 

스페인에서 나는, 내가 가장 확인하기 싫었던 사실을 확인했다. 이렇게 살아지는 인생이 있구나, 이렇게 살아도 행복한 삶이 있구나 하는 것들. 이렇게 사랑할 수 있구나, 이렇게 사랑해도 되는구나 하는 것들. 나의 감정표현은 더이상 오글거리는 것이 아니었고 나의 사랑표현 역시 과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디가 열등하고 어디가 우등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내게 더 잘 맞는 것은 분명이 있다. 그랬을 때, 스페인의 삶은 내가 그 밑바닥을 어느 정도 훑고 왔음에도 내게 더 맞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의 젊음에 1-2년 정도는 그곳에 있어도 좋겠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돌아오겠다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을 하게 한 데에는 당연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자고 일어났을 때 후안마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요컨데 그냥하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부디 스페인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보여주고 싶은게 많다며, 아직 얘기할게 많다며. 친구 이상의 라이프 파트너이길 바란다는 굉장히 묵직한 말이었다. 내가 대체 너에게 뭘 해준건지 이럴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그저 내가 받은 무수히 많을 것들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교환학생을 그렇게까지 갔다 온 사람은 처음본다고들 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많은 경험을 하고 온 게 대단하다고 한다. 물론 기저에는 어떤것도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부딪치고자, 과거의 나를 완전히 놓자 다짐했던 내가 있었겠지만, 그건 부수적이었을 뿐 모든 건 후안마 덕이었다.

 

 

남들은 여행사 통해 가는 여행지를 나는 네 친구의 차를 타고 우리만의 여행을 하고 돌아다녔고, 내가 집에서 쉬고싶다 할때마저도 기어코 끌고 나갔던 수많은 파티와 축제들은 분명 내 인생 최고의 파티였고 축제였다. 그걸 축제라는 단어로 함축해 표현하기에는 그 광기와 행복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또 길가다 아무하고나 늘 나이스하게 말을 트는 네가 소개 시켜준 수많은 사람들이라든지, 그리고 내가 하엔에서 가장 멋진 놈이라며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아시안으로서 가질 수 있는 첫 장벽을 단숨에 무너뜨려줌으로 친해진 사람들이 있다. 드물게 내가 인종차별 비스무레하게 당한다면 내가 아무렇지 않을 때에도 먼저 나서 머리끝까지 화를 내고 상황을 일축해버리던 건 늘 감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분명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아직 볼게 많다. 아직 경험할게 많고 아직 느낄게 많다. 후안마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눈빛을 나누었던 수많은 인연들과 다시 마주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분명 내가 속한 사회가 요구하는 어느 정도의 틀에는 수긍할 필요가 있다. 좋은 직장을 구하고 싶고, 탄탄하고 안정적인 자금의 환경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확실한건 그것들을 구하는 데에 조금 시간을 더 두어도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은 스페인에서 어떻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더 오랜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 있듯, 내가 개발자라는 직업을 갖고 싶은 것은 내가 물론 그 세계와 원리를 좋아하는 것이 가장 크지만 대등하게 중요한 이유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종속성이 없다는 데에 있다. 내가 내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일하는 곳이 미국이든 스페인이든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생 거기에서 사는 건 무모할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직 그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 정도는 살고 역할해보며 어느쪽이든 판단 근거를 마련할 것이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하는 탄탄한 직장과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준비해도 늦지 않는 나이라고 믿는다.

 

이에 선험한 사람들의 용기가 내게 마지막 확신을 주었다. 묵묵히 몇년을 도서관에서 공부하더니 기어코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 호원이형이나, 모든 불안함을 껴안고 갖은 노력으로 파리에서 석사하고 있는 현준이나, 우연한 기회로 베를린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길을 세우고 용기를 내며 늘 참 아름다운 영혼을 흩뿌리고 다니는 규리. 이들의 용기와 올해 나눴던 대화가 내가 이 움직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첫발을 내딛는 손을 잡아 끌어주었다 생각한다.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러운 인생들이다.

 

그래서 이렇게 확신과 사랑을 하고나니 모든게 명확해졌다. 내가 말도안되는 2학기를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이러한 확신이었다. 지하철에서 졸기 싫을때면 스페인어 단어를 외우거나 스페인어로된 인터뷰 영상을 봤다. 과제가 일찍 끝나는 날에는 자기 전까지 iOS 공부를 했다. 새로운 인생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건 꽤나 설레는 일이었고, 더 큰 목표를 향해 가려다 보니 기존의 목표들은 수단이 됐다. 머뭇거리기보단 한 발 더 내딛기에도 시간은 부족하고, 불안하기보단 기대하는 마음이 앞선다.

 

나의 2022년은 그래서 가장 거대했다. 마치 내가 개발을 공부하겠다 마음을 먹었을 때처럼 또 한 번 크게 이정표를 세웠고, 그리고 이정표대로 가면 내가 과거에 그렸던 희미한 미래는 지워질 것이다. 아예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다짐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 된 한 해. 그래서 참 의미깊고 소중한 한 해. 올해는 이제 며칠만을 남겨두고 있다.